어린 시절 아버지가 보시던 외국 자동차 잡지에 빨간 쐐기 같은 차가 있었습니다. 옆구리에 칼집처럼 길게 파인 공기구멍, 이름은 테스타로사. 가격이 9만 달러쯤이었던 기억이 남아 있었습니다.

확인해보니 1985년형 미국 출시가가 94,000달러였습니다. 기억이 거의 맞았습니다.

그 이름이 4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페라리 849 테스타로사입니다. 다만 돌아온 차는 기억 속의 그 차와 기계적으로는 거의 남남입니다.

핵심만 먼저 보면

  • 849 테스타로사는 SF90 스트라달레를 대체하는 페라리 라인업 최상위 모델입니다
  • 4.0L V8 트윈터보 830cv에 전기모터 3개를 더해 합산 1,050cv, 0-100km/h 2.3초입니다
  • 테스타로사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머리입니다. 엔진 캠 커버를 빨갛게 칠한 데서 나온 별명입니다
  • 849라는 숫자는 8기통과 실린더 하나당 배기량을 붙인 것입니다. 512 TR과 같은 작명법입니다
  • 국내 판매가는 7억원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페라리코리아는 가격표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 아세토 피오라노 옵션은 30kg을 덜어내고 뒷날개 형상을 바꿉니다
  • 원조 테스타로사는 플랫12, 849는 V8 하이브리드입니다. 계보상 후계자는 아닙니다
페라리 849 테스타로사 · 사진 | 페라리
페라리 849 테스타로사 · 사진 | 페라리

테스타로사는 원래 차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붉은 머리라는 뜻입니다. 사람 머리카락이 아니라 엔진 이야기입니다. 캠 커버를 빨간색으로 칠한 데서 붙은 별명입니다.

시작은 1950년대 레이싱카였습니다. 500 TR, 250 테스타로사 같은 경주차들이 이 별명을 달았습니다. 양산 로드카에 정식 이름으로 붙은 건 1984년입니다. 잡지에서 보던 그 쐐기형 미드십이 그 차입니다.

4.9L 플랫12에 390마력. 지금 기준으로는 평범하지만 당시에는 기준점이었습니다. 1992년에는 512 TR로 바뀌면서 428마력으로 올랐습니다. 512는 5.0리터 12기통, TR은 테스타로사의 약자입니다.

테스타로사라는 이름이 지나온 자리
테스타로사라는 이름이 지나온 자리

페라리가 849의 이름을 설명할 때 공식적으로 인용하는 건 1950년대 레이싱카입니다. 1984년 로드카가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을 포함해 대부분의 시장에서 사람들이 반응하는 건 1984년 쪽입니다. 마이애미 바이스와 잡지 화보에 나오던 그 빨간 쐐기입니다. 페라리도 이 간극을 모를 리 없습니다. 공식 설명은 레이싱 헤리티지로 두고, 소비자가 떠올리는 건 80년대로 두는 구성입니다.

849라는 숫자는 어디서 나왔나

페라리 설명으로는 8은 기통 수, 49는 실린더 하나당 배기량입니다.

512 TR이 5.0리터 12기통이라 512였던 것과 같은 방식인데, 기준만 전체 배기량에서 실린더 하나로 바뀌었습니다. 296 GTB가 2.9리터 6기통이라 296이었던 것과도 결이 다릅니다.

전체 배기량을 이름에 쓰던 시절에는 배기량이 클수록 높은 자리였습니다. 849는 4.0리터입니다. 원조 테스타로사의 4.9리터보다 작습니다. 전체 배기량을 이름에 넣었으면 계보상 아래로 보였을 숫자입니다.

옆구리 공기흡입구는 원조 테스타로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 사진 | 페라리
옆구리 공기흡입구는 원조 테스타로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 사진 | 페라리

제원을 놓고 보면

2025년 9월에 공개됐고, 국내에는 그해 11월 서울에서 처음 선보였습니다. 스파이더는 2026년 5월에 국내 공개됐습니다.

  • 엔진: 4.0L V8 트윈터보(F154 FC), 830cv
  • 전기모터: 앞 2개, 뒤 1개 합계 220cv
  • 합산 출력: 1,050cv, 최대토크 85.8kg·m
  • 0-100km/h 2.3초, 최고속도 330km/h 이상
  • 건조중량 1,570kg, 출력당 중량 1.5kg/cv
  • 배터리 7.45kWh, 전기만으로 약 25km
  • 다운포스 250km/h에서 415kg (SF90 스트라달레 대비 25kg 증가)
  • 전장 4,718mm, 전폭 2,304mm, 전고 1,225mm, 휠베이스 2,650mm

피오라노 서킷 랩타임은 1분 17초대입니다.

숫자 자체는 압도적입니다. 다만 이 차가 대체하는 건 SF90 스트라달레입니다. 미드십 V8에 전기모터를 얹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라는 구조가 그대로 이어집니다. 원조 테스타로사의 플랫12와는 배치도 기통 수도 다릅니다.

이름을 물려받았을 뿐 기계는 SF90의 후계입니다. 이걸 알고 보면 849가 왜 테스타로사여야 했는지가 오히려 선명해집니다. 기계로 이을 수 없는 계보를 이름으로 이은 겁니다.

아세토 피오라노가 바꾸는 것

849에는 아세토 피오라노라는 옵션 패키지가 있습니다. 마라넬로 본사 옆 테스트 서킷 이름입니다.

겉모습부터 달라집니다. 기본형은 뒤쪽이 두 갈래로 솟은 트윈테일 형태입니다.

기본형의 트윈테일 · 사진 | 페라리
기본형의 트윈테일 · 사진 | 페라리

아세토 피오라노는 그 트윈테일 위에 세로 엔드플레이트를 세우고, 각도를 크게 준 윙 두 개를 얹습니다. 페라리는 이 구조가 트윈테일 대비 수직 다운포스를 3배로 올린다고 설명합니다. 공기저항은 크게 늘리지 않으면서입니다.

아세토 피오라노는 트윈테일 위에 윙이 올라갑니다 · 사진 | 페라리
아세토 피오라노는 트윈테일 위에 윙이 올라갑니다 · 사진 | 페라리
아세토 피오라노가 바꾸는 것
아세토 피오라노가 바꾸는 것

겉으로 안 보이는 쪽이 오히려 많습니다. 서스펜션은 멀티매틱 단일 감쇠율 댐퍼로 바뀌고 스프링이 35% 가벼워집니다. 롤 그래디언트는 10% 줄어듭니다. 앞쪽은 범퍼 플릭을 키우고 언더플로어를 손봤습니다. 타이어는 미쉐린 파일럿 스포츠 컵2가 전용으로 들어갑니다.

색상이 두 가지로 묶이는 건 취향 문제가 아니라 상품 기획입니다. 아세토 피오라노를 고른 차는 멀리서도 구분되게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페라리가 특별 사양에 쓰는 방식입니다.

국내 옵션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30kg 감량과 뒷날개 형상 변경에 얼마를 매겼는지는 딜러를 통해야 확인됩니다.

가격과 경쟁 상대

국내 판매가는 7억원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페라리코리아는 가격표를 공개하지 않는 브랜드라 정확한 숫자는 공식 자료에 없습니다. 스파이더는 옵션을 넣으면 10억원 안팎이 될 거라는 게 업계 전망입니다.

  • 페라리 849 테스타로사: 1,050cv, 7억원대(알려진 수준), V8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 람보르기니 레부엘토: 1,015마력, 7억 8,000만원부터, 자연흡기 V12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 맥라렌 W1: 1,275마력, 미국 210만 달러부터, 한정판이며 이미 완판

레부엘토와 849는 같은 값대에서 반대 방향을 골랐습니다. 레부엘토는 자연흡기 V12 소리를 끝까지 남겼고, 849는 V8 터보에 전기를 얹어 숫자를 가져갔습니다.

무엇이 맞다기보다, 내연기관에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지킬지에 대한 답이 달랐던 겁니다.

페라리가 이름을 꺼내 쓰는 방식

849 테스타로사는 처음이 아닙니다.

데이토나 SP3는 1967년 데이토나 24시 1·2·3위를 딴 이름이고, 12칠린드리는 12기통이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몬자 SP1과 SP2도 과거 레이서의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이름을 다시 꺼내는 건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면서 효과가 큽니다. 상표는 이미 있고, 그 이름이 쌓아둔 기억은 소비자 머릿속에 있습니다. 페라리는 그걸 꺼내 쓰기만 하면 됩니다.

위에서 본 849 테스타로사 후면 · 사진 | 페라리
위에서 본 849 테스타로사 후면 · 사진 | 페라리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닙니다. 어차피 이 값대의 차를 사는 사람들은 성능표만 보고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만드는 서사가 상품의 일부입니다.

다만 사는 쪽에서는 구분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849가 테스타로사인 건 기계가 이어져서가 아니라 페라리가 그렇게 부르기로 해서입니다.

정리하면

849 테스타로사는 잘 만든 차입니다. 1,050cv에 2.3초, 건조중량 1,570kg. 숫자로 시비 걸 구석은 없습니다.

이름은 다른 문제입니다. 원조 테스타로사는 4.9L 플랫12였고 849는 4.0L V8 하이브리드입니다. 기계적으로 이 둘을 잇는 건 없습니다. 849가 실제로 물려받은 건 SF90 스트라달레의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테스타로사라는 이름을 붙인 건, 그 이름이 아직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40년 전 잡지에서 그 차를 본 사람이 아직 살아 있고, 그중 일부는 지금 7억원짜리 차를 살 수 있는 나이가 됐습니다.

1985년에 94,000달러였던 테스타로사는 1989년에 181,000달러가 됐습니다. 그 차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값이 올라서가 아니라 옆구리의 칼집과 플랫12 소리가 남아서였습니다. 849가 40년 뒤에 무엇을 남길지는 지금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512 TR이나 원조 테스타로사, 기억하고 계신 분 있으실까요?

※ 이 글의 가격과 제원은 2026년 9월 19일 기준으로 확인한 자료입니다. 국내 판매가는 페라리코리아 공식 발표가 아니라 매체를 통해 알려진 수준이며, 옵션 구성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제원은 페라리 공식 발표 기준으로 국내 인증 수치와 다를 수 있습니다.